행복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 살아 보니 행복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이었다. 행복에 관한 한, 우리는 일용직 신세였다. 비정규직이었다. 내일 몫까지 미리 쌓아 두기 힘든 것, 그게 행복이었다. 냉정하고 불공평한 세상 탓만은 아니었다. 스스로 행복의 기준이 늘 바뀌기에 오래 행복을 붙잡아 둘 수 없었던 것. 취직만 하면 바랄 게 없다고 생가하다 직장에 들어가선 저 사람만 없으면, 이 일만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한다. 내 집 한 칸을 소원하다가 막상 생기면 더 큰 평수를 원한다. 비가 오면 햇빛을 그리워하고, 내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라던 사람과 이어지면 잡은 물고기엔 밥을 주지 않는 법이라 한다. 누가 하루하루 바뀌는 그 기준을 다 맞춰줄 수 있을까. 기도를 듣는 신도 머리가 아프리라. 현인들은 말한다. “세상이 이 만큼이라도 유지되는 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”이라고. 행복의 정규직이 되지 못한 건 누가 방해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한 결과였다. 행복에 대해 겸허해 지기로 했다. 드릴 기도라곤 오직 “감사합니다.”뿐임을 깨닫자 더 자주 행복해졌다. 어쩌다 하루 행복을 공치는 날이 있어도 오래 불행하지 않았다. 다음 날 벌어 다시 따뜻해지면 되니까. - 정희재 지음, (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)중에서 |