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독 락 (獨樂)

창산 2024. 9. 5. 09:06







독 락 (獨樂)

늙는다는 것은
분명 서러운 일이다.
늙었지만
손끝에 일이 있으면
그런대로 견딜 만하다.

​ 쥐고 있던 일거리를 놓고
뒷방 구석으로
쓸쓸하게 밀려나는
현상을

‘은퇴’라는 고급스런 낱말로
포장하지만,
뒤집어 보면

처절한 고독과 단절이
그 속에 숨어 있다.

​그래서 은퇴는 더 서러운 것이다.

방콕이란 단어가
은퇴자들 사이에
유행하고 있다.

​세간에서는 그들을
화백(화려한 백수),
불백(불쌍한 백수),

마포불백
(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)
등으로 나누고 있다.

​화백이든 불백이든 간에
마음 밑바닥으로 흐르는
깊은 강의 원류는

‘눈물 나도록 외롭다’는
사실을 한 치도
벗어 날 수 없다는
것이다.

​ 화백도
골프 가방을 메고 나설 때
화려 할 뿐이지

집으로 돌아 오면
심적 공황상태인
방콕을 면치 못한다.

​ 집단에 소속되지 못하고
지속적인 노동의 즐거움을
잃어버렸기 때문이다.

​ 어제 진 태양은
오늘 다시 떠오르지만,
은퇴자들은 어제도,
오늘도 갈 곳이 없다.

​이럴 때마다 다산 선생의
'독립'이란 시를
기억하며
혼자 웃는다.



'대지팡이 짚고
절간에나 노닐까
생각다가
그냥 두고 작은 배로
낚시터나
가 볼까 생각하네

​아무리 생각해도
몸은 이미 늙었는 데
작은 등불만 예정대로
책 더미에 비추네'

​곰곰히 생각해 보면
방콕이 독락(獨樂)으로 가는
지름길이 아닌가
생각 된다.

​영화나 책을 둘이 나란히
앉아서 본다고
두 사람이 함께 보는
것인가?

​아니다.
나는 내 것을 보고
너는 네 것을 볼
뿐이다.

그래서 생애도 혼자서,
죽음도 홀로
맞는 것이다.

​ 모든 위대한 것들은
모두 홀로이다.
태양이 그렇고
하느님이 그러하다.

​태양에 암수가 없고,
아버지 하느님과
어머니 하느님이
함께 계신 것이 아니다.

​온리 원(Only one)이란
고독이 얼마나
위대한 존재인가를
알게 해준다.

​경주 안강의 자옥산
기슭으로
낙향한 회재 이언적 선생도
독락당을 짓고

인고의 7년 세월을
외로움과 함께
버텨 냈다.



사무치도록 외로웠기
때문에
담을 헐어낸 자리에
살창을 끼워

계곡의 물소리를
눈으로 들으면서
세월을 보냈다.

​ 조선조 초의 학자 권근의
'독락당기'를 보면
홀로의 즐거움이
일목요연하다.

​'봄꽃과 가을달을 보면
즐길 만한 것이지만
꽃과 달이 나와 함께 즐겨
주지 않네.

​눈 덮힌 소나무와
반가운 빗소리도
나와 함께 즐기지 못하니
독락이라 해야
하지 않을까.

​ 글과 시도 혼자 보는 것이며
술도 혼자 마시는 것이어서
독락이네.

​옛 선비들의 독락에는
다분히 풍류적인
즐거움이 서려 있지만,

오늘의 백수들이
곧잘 읊조리는 방콕에는
궁상과 자탄이
한숨처럼 배어 있다.

​강산과 풍월은
원래 주인이 없고
한가로운 사람이
바로 주인이라고 했다.

​홀로 독락을 못 즐길 양이면
풍월의 주인이라도
될 일이다.

풍월주인은 정년도
없고 은퇴도 없다.

​'문밖 나서니
갈 곳이 없네'란 말은
입 밖에도 내지 말자.

​= 모셔온 글 =