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늙어가는 아내에게*

창산 2023. 8. 10. 10:45







늙어가는 아내에게



내가 말했잖아
정말, 정말, 사랑하는,
사랑하는, 사람들,

사랑하는 사람들은,
너, 나 사랑해?
묻질 않어

그냥, 그래,
그냥 살지
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
말하지 않고,
확인하려 하지 않고,

그냥 그대 눈에 낀
눈곱을 훔치거나
그대 옷깃의 솔밥이
뜯어주고 싶게
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
생각나?

지금으로부터 14년전,
늦가을,
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
많던 동네의
어둑어둑한 기슭
, 높은 축대가 있었고,

흐린 가로등이 있었고
그대의 집, 대문 앞에선
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
바람이 불었고

머리카락보다
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
들어가는 그대는
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
주었지
그런거야,



서로를 오래 오래 그냥,
보게 하는 거
그대가 와서,
참으로 하기 힘든,

그러나 속에서는
몇 날 밤을 잠 못자고
단련시켰던 뜨거운 말,

저도 형과 같이
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
그대의 그 말은

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
한 알 한 알 들어내고
적갈색의 빈 병을
환하게 했었지

아,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
그대 마음이었지
너무나 벅차 그 말을
사용할 수 조차 없게
하는 그 사랑은

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,
정신없이,
아픔을 함께 앓고
싶어하는 것임을

한밤, 약병을
쥐고 울어버린
나는 알았지



그래서, 그래서,
내가 살아나야 할
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
내가 살아갈 미래와
교대되었고

이제는 세월이라고
불러도 될 기간을
우리는 함께 통과했지

살았다는 말이
온갖 경력의 주름을
늘리는 일이듯
세월은 넥타이를
여며주는 그대 손끝에
역력하지

이제 내가 할 일은
아침 머리맡에 떨어진
그대 머리카락을

침 묻힌 손으로
집어내는 일이 아니라
그대와 더불어,
최선을 다해 늙는
일일 것이야

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
힘 없는 소리로, 임자,
우리 괜찮았지?
라고 말할 수 있을 때,

그때나 가서
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
그때나 가서
할 수 있는 말일 거야

-글(詩) : 황지우