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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단지몽(邯鄲之夢)*

창산 2024. 11. 1. 09:21







한단지몽(邯鄲之夢)

당나라 현종(玄宗)때의
이야기이다.

도사 여옹이
한단[하북성(河北省)내]의
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
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
옆에 와 앉더니

​산동(山東)에서 사는
노생(盧生)이라며
신세 한탄을 하고는
졸기 시작했다.

​여옹이 보따리 속에서
양쪽에 구멍이 뚫린
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자
노생은 그것을 베고
잠이 들었다.

​노생이 꿈속에서 점점 커지는
그 베개의 구멍 속으로
들어가 보니
고래등같은 기와집이
있었다.

​노생은 최씨(崔氏)로서
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
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
나아가 순조롭게
승진했다.

​ 경조윤(京兆尹):
서울을 다스리는
으뜸 벼슬)을거쳐
어사대부(御史大夫) 겸
이부시랑(吏部侍郞)에
올랐으나

재상이 투기하는 바람에
단주 자사(端州刺史)로
좌천되었다.

​ 3년 후
호부상서(戶部尙書)로
조정에 복귀한 지
얼마 안 되어
마침내 재상이 되었다.

​ 그 후 10년간 노생은
황제를
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
이룩한 명재상으로
이름이 높았으나

어느 날,
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.
​변방의 장군과 모반을
꾀했다는 것이다.

​ 노생은 포박 당하는
자리에서
탄식하여 말했다.



"내 고향 산동에서 땅뙈기나
부쳐먹고 살았더라면
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
않았을 텐데,

무엇 때문에 애써 벼슬길에
나갔는지 모르겠다.

​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
한단의 거리를 걷던 때가
그립구나.

​하지만
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
소용이 있겠는가."

​그는 칼을 들어 자결하려
했지만
아내와 아들이 말리는
바람에
미수에 그쳤다.

​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
모두 처형당했으나

그는 환관(宦官)이
힘써 준 덕분에
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
유배되었다.

​ 수년 후 원죄(寃罪)임이
밝혀지자
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
중서령(中書令)을
제수(除授)한 뒤

연국공(燕國公)에 책봉하고
많은 은총을 내렸다.

​ 그 후 노생은 모두
권문세가(權門勢家)와
혼인하고

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
열 손자를 거느리고
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

황제의 어의(御醫)가
지켜보는 가운데 80년의
생애를 마쳤다.

​노생이 깨어 보니 꿈이었다.

​옆에는 여전히 여옹이
앉아 있었고
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는
기장밥도 아직
다 되지 않았다.

​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
여옹은 웃으며 말했다.

"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."

​노생은 여옹에게 공손히
작별 인사를
고하고 하단을 떠났다.

☆한단지몽(邯鄲之夢)☆
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,
인생의 덧없음과 영화(榮華)의
헛됨의 비유

= 모셔온 글 =